02.03.25 Avyakt Bapdada Korean Murli
15.10.2004 Om Shanti Madhuban
한 분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너희
단계를 한결같고 안정되게 만들어라.
자아 존중에 머물며 모든 이를 존중해주어라.
오늘 밥다다는 각 자녀의
이마에서 빛나고 있는 3개의 행운의 별을 보고 있다. 첫째는 신의 부양을 받는 행운이고, 둘째는 신의 공부를 하는 행운이며, 셋째는 신의 축복을
받는 행운이다. 이런 식으로 그는 각자의 이마 가운데서 3개의 별을 보고 있다. 너희들 역시 너희 행운의 반짝이는 별들을 보느냐? 너희는
그것들을 볼 수 있느냐? 너희는 세상의 어느 누구의 이마에서도 그렇게 고귀한 행운의 별들이 빛나는 것을 볼 수 없을 것이다. 이 행운의 별들이
너희 모두의 이마에서 빛나고 있다. 그러나 몇몇 경우에는 그 광채에서 차이가 난다. 몇몇의 광채는 아주 강력하고, 나머지들의 광채는 그저 그런
수준이다. 행운을 주는 공여자는 너희 자녀들 모두에게 똑같은 행운을 주었다. 그는 누구에게도 뭔가 특별한 것을 주지는 않았다. 부양도 같고,
너희들 모두 함께 공부하고 있으며, 너희 모두 똑같은 축복을 받았다. 세계의 모든 구석마다 어디서든 공부는 똑같다. 같은 날짜에 같은 멀리를
공부하고, 각자의 나라에 따라서 암릿 벨라의 시간도 같다는 것은 경이롭다. 너희가 받는 축복도 역시 같다. 슬로건도 역시 같다. 거기에 차이가
있느냐? 이에서 미국과 런던 사이에 차이가 있느냐? 없다. 그런데 왜 차이가 생기느냐?
밥다다는 암릿 벨라에 모든 이를
똑같이 부양해준다. 모든 이가 끊임없이 기억하는 똑같은 방법을 받는다. 그러면 왜 그것에 등수가 생기느냐? 방법은 같은데 왜 성공을 얻는 데서
차이가 생기느냐? 밥다다는 모든 곳의 자녀들 모두를 똑같이 사랑한다. 설령 어떤 이가 자기 노력에서 꼴찌라 해도 밥다다는 마지막 사람에게도
여전히 똑같은 사랑을 가진다. 사실 그는 사랑뿐만 아니라 꼴찌에게도 역시, 이 사람이 빨리 가서 첫째가 되어야 한다는 자비심도 가진다.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너희들 모두가 머나먼 여기까지 도달했다, 그렇지 않으냐? 신의 사랑이 너희를 여기로 끌어당긴다, 그렇지 않았느냐? 너희들은 이
사랑의 줄에 끌려서 여기에 왔다. 이렇게 밥다다는 모든 이를 사랑한다. 너희들은 이것을 믿느냐 아니면 바바가 너희를 사랑하는지 또는 그가 덜
사랑하는지에 대해 의문을 품느냐? 밥다다는 각 자녀 하나하나를 그 다음의 자녀보다 더 많이 사랑하고 신에게서 오는 이 사랑은 너희 자녀들을
특별히 부양해 주는 기반이다. 너희들 각자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아버지에 대한 너희의 사랑이 더 크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면 다른 누군가의 사랑이
더 크고 너희의 사랑은 더 작다고 생각하느냐? 너희들은 이런 식으로 생각하느냐? 너희는 바바에 대한 너희 사랑이 더 크다고 생각하지 않느냐?
그렇겠지? 판다바들은 어떠냐? 너희들 각자는 “나의 바바!”라고 말할 것이다. 너희는 그가 센터 책임자의 바바라든가, 다디의 바바, 다디 잔키의
바바라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너희가 이렇게 말할 것이냐? 아니다! 너희들은 “나의 바바!”라고 할 것이다. 너희가 “나의 것”이라 했고,
아버지 역시 “나의 것”이라고 했으니, 그 다음에는 “나의 것”이라는 한 마디를 통해서 자녀들은 아버지에게 속하고 아버지는 자녀들에게 속한다.
여기에 어떤 노력이 들었느냐? 노력이 필요했느냐? 어쩌면 약간 들었느냐? 아니냐? 때로는 그것이 노력이라고 느끼느냐? 너희는 그것이 노력이라고
느끼지는 않겠지? 너희는 그렇게 느낀다. 그렇게 노력이 필요하다고 느낄 때, 너희는 무엇을 하느냐? 너희는 피로해지느냐? 마음에서 우러난
사랑으로 “나의 바바”라고 하여라, 그러면 노력이 사랑으로 변할 것이다. 너희가 “나의 바바”라고 말하자마자 그 소리가 바바에게 도달하고,
그러면 아버지가 가외의 도움을 준다. 그러나 그것은 마음의 거래다. 말로 하는 거래가 아니다. 그것은 마음으로 맺는 거래다. 그래서 너희들은
마음으로 거래하는 데 영리하다, 그렇지 않으냐? 너희는 거래를 맺는 방법을 아느냐? 뒤에 앉아 있는 이들은 거래하는 방법을 아느냐? 이런 이유로
너희들은 여기에 도달했다. 그렇긴 한데 누가 제일 멀리 떨어진 데서 사느냐? 미국인이냐? 미국 출신인 이들이 제일 멀리 떨어진 데 있느냐,
아니면 아버지가 제일 멀리 있느냐? 미국은 이 세계에 있다. 아버지는 다른 세계에서 왔다. 그럼 누가 제일 먼 거주지에서 살고 있느냐? 그것은
미국에서 온 이들이 아니다. 밥다다가 가장 멀리 떨어져 있다. 한 분은 서틀 리전에서 오고, 다른 한 분은 지고의 지역에서 오는데, 그것에
비하면 미국이 무엇이냐? 아무것도 아니다!
그래서 머나먼 나라의 거주자인
아버지는 오늘 멀리 떨어져 있는 이 물질세계에 살고 있는 자녀들을 만나려고 왔다. 너희는 오늘 밥다다가 너희들을 위해서 왔다는 도취감을
가지느냐? 바라트 사람들은 어차피 아버지에게 속하지만, 밥다다는 특히 2중의 외국인들을 보고 기쁘다. 그가 왜 기뻐하겠느냐? 밥다다는 아버지가
바라트에 왔기 때문에 바라트 사람들이 이 가외의 도취감을 느낀다는 것을 알아본다. 그렇지만 바바는 2중의 외국인들이 비록 다른 문화권에서 왔지만
변형되어서 브라민 문화 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그들을 사랑한다. 너희들은 변하지 않았느냐? 너희는 더 이상은 이건 바라트의 문화이고 너희의
문화는 다르다고 생각하지는 않겠지? 아니다. 밥다다가 본 결과는 모든 이가 한 문화에 속하는 이들이 되었다는 것이다. 너희가 어디서 왔든
육신이라는 면에선 국가가 달라도 영혼은 브라민 문화에 속한다. 너희는 밥다다가 2중의 외국인들에 대해서 좋아하는 다른 한 가지를 아느냐?
너희들은 그게 무엇인지 아느냐? (그들은 금방 봉사에 관여합니다.) 다른 것을 말해 보아라. (그들은 직장에서도 일하고 봉사도 합니다.)
인도에서도 그렇게 한다. 인도에서도 역시 그들은 직장에서도 일하고 봉사도 한다. (무슨 일이 일어나면 그들은 본인의 약점에 대해서 정직하게
말합니다, 그들은 아주 정직합니다.) 앗챠. 인도 출신인 이들은 그렇게 정직하다, 그렇지 않으냐?
밥다다는 비록 그들이 멀리
떨어진 데서 살고 있지만 아버지에 대한 사랑 때문에 대다수가 사랑의 과목에 합격한 것을 보았다. 바라트는 어차피 그 행운을 가졌지만, 멀리
떨어진 데 살면서도 모든 이가 사랑에서 통과했다. 만일 밥다다가 너희의 사랑에 퍼센티지가 있는지 여부를 묻는다면?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라는
과목에 퍼센티지가 있느냐? 100%의 사랑이 있다고 믿는 이들은 손을 들어라. 100%냐? 바라트 주민들은 손을 들고 있지 않구나! 보아라,
바라트는 이 행운을 받았다. 바라트가 받은 최대의 행운은 아버지가 바라트에 왔다는 점이다. 아버지는 이것에서 미국을 선택하지 않았다. 그는
바라트를 선택했다. 이 사람(뉴욕에서 온 가야트리벤)은 앞에 앉아 있다. 그렇지만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너희는 깊은 사랑을 가졌다. 문제들은
일어나지만 “바바, 바바”라고 말함으로써, 너희들은 그 문제들을 끝낸다.
그런데도 밥다다는 너희에게
사랑이라는 과목에서 합격 점수를 주었으니, 그럼 이제 너희가 합격해야 할 다른 무엇이 있느냐? 너희는 합격해야 한다! 너희들은 합격했고, 너희는
합격해야 한다. 지금 현재의 때에 의해서 밥다다는 각 자녀의 자아 변화의 힘에 대한 퍼센티지도 사랑의 힘에 대해서 너희 모두 손을 들었을 때만큼
많기를 원한다. 너희들 모두 그것에 손을 들지 않았느냐? 너희들의 자아 변화에도 그렇게 속도가 빨랐느냐? 너희들은 완전히 손을 들겠느냐, 절반만
들겠느냐? 너희는 손을 어느 정도로나 들겠느냐? 너희들은 변화를 가져오긴 하지만, 그것에 시간이 걸린다. 때가 가까워옴에 따라 자아 변화의 힘이
참으로 빨라져야 한다. 종이 한 장에 마침표를 찍는 데, 얼마의 시간이 걸리느냐? 그것에 시간이 얼마나 들겠느냐? 마침표를 찍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느냐? 단 1초도 안 걸린다. 그것이 옳으냐? 그럼 너희들 역시 그렇게 속도가 빠르냐? 손을 들어보라고 너희에게 부탁해야 되겠느냐?
너희들은 그저 손을 반만 올릴 것이다. 시간의 속도는 빠르고, 자아 변화의 힘도 그만큼 빨라야 하며, 너희가 변화에 대해서 말할 때는
“변화”라는 말보다 먼저 “자아”라는 말을 항시 기억하여라. 변화가 아니라 자아 변화이다. 밥다다는 자녀들이 1년 이내에 본인들의 산스카라
변화를 통해 세계 변화를 가져오겠다고 약속한 것을 기억한다. 너희는 기억하느냐? 너희들은 그 해를 축하하지 않았느냐? 산스카라의 변화를 통한
세계 변화였다. 세계의 속도는 극단으로 치닫고 있는데, 너희들 산스카라의 변화 속도도 그만큼 빠르냐? 외국 땅의 특질은 대체로 거기서는 모든 게
빠르다는 점이다, 그들은 모든 것을 빨리 행한다. 그래서 아버지가 묻고 있다: 너희들은 산스카라를 변화시키는 데서 빠르냐? 밥다다는 지금 자아
변화의 속도가 빨라지는 것을 보고자 한다. 너희 모두 “밥다다가 무엇을 원하십니까?”라고 묻지 않느냐? 너희들끼리 함께 토의하면서, 서로에게
“밥다다는 무엇을 원하시죠?”라고 묻는다. 밥다다는 너희가 1초 만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기를 원한다. 너희들이 종이에 마침표를 찍을 때처럼,
이것은 그보다도 더 빨라야 한다. 변화를 가져오는 데서 정확하지 않은 모든 것들에 대해 마침표를 찍어라. 너희는 마침표를 찍는 방법을 아느냐?
너희들은 알겠지? 그렇지만 때로는 그것이 물음표가 된다. 너희는 마침표를 찍는데, 그것이 물음표가 된다. “그것은 왜 이렇지?”, “이것이
무엇이지?” “왜?”와 “무엇이?”라는 이런 의문들은 마침표를 물음표로 만든다. 밥다다는 앞서도 너희에게 “왜? 왜?”라는 말을 하지 말라고
했다. 그 대신에 너희는 뭐라고 말해야 하느냐? “날아라” 또는 “와!”이다. “와!”라고 하든가 “날아라”라고 하여라. “왜? 왜?”라고 하지
말아라. 너희들은 금방 “왜? 왜?”라고 말하는 방법을 안다. 그 말이 그저 그렇게 나오느냐? 이 “왜”가 올 때마다, 그 대신 “와!
와!”라고 하여라. 만일 어떤 이가 뭔가를 행하거나 무슨 말을 한다면, “와 드라마, 와!”라고 하고, “이 사람은 왜 이렇게 하고 있지? 이
사람은 왜 이런 말을 하고 있지? 상대방이 이렇게 한다면 나도 이렇게 하겠어.”라는 것은 아니게 하여라. 아니다!
오늘날 밥다다가 본 것은….
내가 너희에게 말해줘야 되겠느냐? 너희들은 변화를 가져오기를 원한다, 그렇지 않으냐? 그런데 오늘날의 결과를 보면, 인도 국내에서든 해외에서든,
양쪽 모두에서 하나의 물결이 일어나고 있는데, 그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렇게 되어야 해, 나는 이것을 받아야만 해, 이 사람은 이것을 해야만
돼, 오직 내 생각과 말대로 되어야만 해.”라는 것이다. 너희의 생각 속에서 여전히 일어나는 이런 기대사항들은 낭비적인 생각이며, 그것들은
너희가 최고가 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밥다다는 잠시 동안 모든 이의 낭비의 차트에 주목했다. 그는 그것을 점검했다. 밥다다에게는 강력한
기계가 있다. 그에게는 너희 모두가 가진 그런 컴퓨터는 없다. 너희 컴퓨터에는 심지어 오류가 생길 수도 있다. 그러나 밥다다에게는 아주 빠른
체킹 머신이 있다. 밥다다는 너희들 대다수가 하루를 지내면서 때때로 낭비적인 생각을 하는 것을 보았다. 어떻게 되느냐 하면, 낭비적인 생각들의
무게는 무겁고, 가장 최고의 생각들의 무게는 가볍다. 그래서 너희가 때때로 하는 이 낭비적인 생각들이 너희의 머리를 무겁게 한다. 그것들은
너희의 노력을 무겁게 만든다. 무게가 나가는 짐이 있게 되고, 그것이 너희를 끌어당긴다. 그래서 자아 발전을 위한 승강기가 될, 단지 사다리도
아니라 승강기가 될 순수한 생각의 수가 더 적어지면, 그때는 너희가 그 노력의 사다리를 올라가야 한다. 그저 두 개의 용어만 기억하여라. 낭비를
끝내기 위해서는 단순히 암릿 벨라부터 밤까지 너희의 생각, 말, 행위, 활동에서 두 가지 용어를 써라. 이것을 실제적인 형태로 옮겨라. 그 두
개의 용어는 “자아 존중과 다른 이들에 대한 존중”이다. 너희는 자아 존중에 머물러야 하고 다른 이들을 존중해야 한다. “어떤 이가 어떻든 나는
그를 존중해야 한다. 존중해주면서, 나의 자아 존중의 단계에 머물러 있어야 된다.” 둘 사이에 균형이 있어야 한다. 때때로 너희들은 자아 존중의
상태에는 아주 잘 머물지만, 다른 이들을 충분히 존중해 주지는 않는다. 그 사람이 너희를 존중해줘야만 너희가 존중해 주는 것은 아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 “나는 공여자가 되어야 한다.” 쉬브 샥티 판다바 군대는 공여자의 자녀들인, 공여자들이다. “상대방이 준다면 나도 줄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사업적인 거래다. 그것은 공여자가 아니다. 그러니 너희는 사업가냐, 아니면 공여자이냐? 공여자는 결코 가져가지 않는다. 너희의
태도와 시선에서 그저 이런 목표를 가져야 한다: 다른 이들이 아닌, 내가 해야 한다. 나는 각각의 개인들에게 한결같이 좋은 염원과 순수한 느낌을
가져야 한다. 즉, 그들이 기야니이든 기야니가 아니든 상관없이 모든 이들에게 그래야 한다. 사실 너희들은 기야니가 아닌 사람들에게는 좋은 염원을
가진다. 그러나 모든 기야니 영혼들에게도 매 순간마다 좋은 염원과 순수한 느낌이 있게 해라. 너희의 시선이 그렇게 되게 하고, 너희의 태도가
그렇게 되게 해라. 너희의 눈에는 눈동자가 있다. 한번이라도 그 눈동자가 사라진 적이 있느냐? 만일 너희 눈 속에서 눈동자가 사라진다면, 너희가
어떻게 되겠느냐? 볼 수 있겠느냐? 그러니 눈 속에 눈동자가 있는 것처럼, 영혼과 한 점인 아버지가 너희의 눈 속에 합쳐져 있다. 보는
점(영혼)이 결코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영혼과 아버지를 의식하는 한 점이 너희 태도나 시선에서 사라지지 않게 하여라. 너희는
아버지를 따라야 한다, 그렇지 않으냐? 그래서 아버지가 그의 시선과 태도에 모든 자녀들에 대한 존중심을 가지는 것처럼, 그가 너희들을 배려하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너희의 시선과 태도에도 자아 존중과 다른 이들에 대한 존중이 있어야 한다. 너희가 마음속에 가진 생각들(“이 사람은 변해야
한다, 그는 저렇게 하면 안 된다, 이 사람은 원래 이렇다”)은, 그런 가르침을 준다해도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너희가 다른 이들을
존중해주어야만, 그들이 너희가 마음속에 가진 생각들(“저 사람은 변해야 한다, 또는 이것을 해야 하고, 저것을 해야 한다)을 실천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들은 너희의 말이 아니라 너희의 태도를 통해서 변할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무엇을 할 것이냐? 자아 존중과 다른 이들에 대한 존중,
너희는 이 두 가지를 모두 기억하겠지? 아니면 그저 자아 존중만 기억할 것이냐? 존중한다는 것은, 존중을 받는다는 뜻이다. 존중한다는 것은
존중받을만큼 가치 있게 된다는 뜻이다. 영혼의식의 사랑을 나타내는 표시는 너희의 좋은 염원과 순수한 느낌으로 다른 이들의 나약함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지난번 메시지에서도 밥다다가 말했듯이, 지금 너희들의 모습이 자비로워지게 하여라. 심지어 지난 생에도 너희의 살아 있지 않은 형상들이
자비로웠으며, 신봉자들에게 자비심을 가졌다. 너희의 살아 있지 않은 형상들조차도 그렇게 자비로운데, 살아 있는 형태는 어떻겠느냐? 살아 있는
형태는 자비심의 광산일 것이다. 자비심의 광산이 되어라. 누가 오든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어라. 이것이 사랑의 징표다. 너희는 그렇게 하기를
원하겠지? 아니면 단지 듣기만을 원하느냐? 너희는 그렇게 해야 되고, 그것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바바는 너희에게 “밥다다가 무엇을
원하는가?”에 대한 답을 주고 있다. 너희는 그런 질문을 했고, 그래서 밥다다가 너희에게 답변해 주고 있는 것이다.
지금 현재 바라트에서나
외국에서나, 봉사가 아주 훌륭하게 확장되고 있다. 밥다다는 너희가 누군가를 특별한 과업을 수행할 도구로 만들기를 바란다. 누군가를 협조하게
만들어서, 그가 지금까지는 뭔가를 하길 원하기만 했지만, 이제는 실제로 그 일을 하는 것을 보여주게 하여라. 너희들은 여러 프로그램들을 했다.
너희가 어디서 프로그램들을 개최했든 밥다다는 그 프로그램들을 수행한 이들 모두를 축하해주고 있다. 이제 좀 더 새로움을 보여주어서, 그들이
너희를 대신해서, 너희가 하듯이 아버지를 드러내게 하여라. 그들의 입에서도 “이 공부는 신의 가르침입니다”라는 말이 나오게 하여라. “바바,
바바”가 그들 마음에서 우러나게 해라. 그들은 협조적으로 된다. 그러나 아직도 한 가지가 남아있는데, 그것은 이런 것이다: “이 분이 유일한
분이다, 이분이 바로 그 분이다, 이분이 바로 그 분...”. 그런 소리가 퍼지게 하여라. “브라마 쿠마리스는 대단히 훌륭한 일을 하고 있다.
그들은 이것을 할 수 있다.” 지금까지는 이 정도가 되지는 못했지만, 그들이 이제는 “이 분이 유일한 분입니다, 이것은 신이 주신
지식입니다”라고 말하게 하여라. 아버지를 드러낼 이들이 두려움 없이 그런 말을 하게 해라. 너희는 신이 이 과업이 이루어지게 만들고 계신다고,
그것은 신의 과업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이들이 소리쳐 불렀던, 신 아버지를 안다고 그들이 말하게 하여라. 이제는 그들에게 그런
경험을 주어라. 매 순간 너희의 마음 속에는 무엇이 있느냐? “바바, 바바, 바바!”이다. 그런 그룹이 나오게 하여라. 그것은 좋다. 너희는
그렇게 할 수 있다. 지금 이 순간까지 이뤄진 일들은 전부 다 괜찮았다. 변화가 일어났다. 그러나 마지막 변화는 “이분이 바로 그분입니다.
이분이 바로 그분이고, 이분이 바로 그 한 분입니다.”라는 것이다. 그 일은 브라민 가족이 한결같은 단계를 가질 때 일어날 것이다. 지금 현재는
단계가 계속해서 변한다. 한결같은 단계가 한 분을 드러낼 것이다. 이게 괜찮으냐? 그럼 2중의 외국인들아, 모범이 되어라. 존중해주고 자아
존중에 머무는 것에 모범이 되어라. 이것에서 등수를 차지하여라. 그들은 애착을 정복한 가족의 예를 보여주는데, 거기서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심부름꾼, 하인들, 다른 모든 이들이 애착의 정복자가 되었다. 마찬가지로 너희가 어디에 있든, 그것이 미국이든, 호주든, 다른 어떤 나라이든,
하나의 지시를 따르고, 스스로 자아존중에 머물며 다른 이들을 존중해주는 데서 일치단결하여, 변함없이 한결같은 데서 등수를 차지하여라. 너희는
그것을 차지할 수 있겠지? 그것을 차지하여라. 너희는 등수를 차지하길 원하느냐?
아버지의 눈 속에 합쳐져 있는
모든 곳의 자녀들 모두에게, 눈의 빛인 자녀들에게, 변함없이 한결같은 단계에 안정되어 머무는 자녀들에게, 자신의 행운의 별들이 한결같이 반짝이고
있는 행운아 자녀들에게, 변함없이 자아 존중을 갖고 다른 이들을 자신과 똑같이 존중하는 이들에게, 노력의 속도를 빠르게 만드는 자녀들에게,
밥다다의 사랑과 기억과 축복과 나마스테.
축복:
너희의 참된 동반자와
함께 함으로써 사랑하며 애착 없이 되어라.
매일 암릿 벨라에 밥다다와 모든
관계를 다 맺는 행복을 누리고, 그것을 다른 이들에게도 기부하여라. 모든 종류의 행복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다른 이들에게도 이 권리를 주어라.
어떤 물리적인 과업을 하는 동안 육신의 동료들을 기억하지 말고 제일 먼저 아버지를 기억하여라. 왜냐하면 아버지가 너희의 진정한 친구이기
때문이다. 참된 동반자와 동반할 때, 너희는 쉽게 초연해지고 모든 이를 사랑하게 될 것이다. 모든 과업에서 모든 관계로 아버지 한 분을 기억하는
이들은 쉽게 애착에서 자유로워진다. 그들은 아무에게도 애착이 없고 누구에게도 굴종하지 않으며, 그래서 그들은 마야에게 패배할 수 없다.
슬로건:
마야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트리칼다르시이며 트리네트리가 되어라, 그러면 너희가 승리할 것이다.
아비약트 신호 : 진실함과 좋은
매너의 문화를 채택하여라.
진실을 나타내는 표시는 좋은
매너를 가지는 것이다. 너희가 진실되며 진실의 힘을 가졌을 때, 너희는 결코 좋은 매너를 갖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너희가 진실을 증명해야
할지도 모르지만, 좋은 매너로 이렇게 하여라. 뭔가가 진실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좋은 매너를 포기한다면, 너희는 그것을 증명할 수 없을
것이다. 좋은 매너가 결여되어 있음을 나타내는 표시는 고집을 부리는 것이고, 좋은 매너를 나타내는 표시는 겸손함이다. 진실을 증명하는 이들은
변함없이 겸손하게 머물며 항상 좋은 매너로 모든 이를 대할 것이다.